*현대 AU.
*고등학생.
"좋아, 시리우스."
제임스가 매우 드물게도 아주 신중한 표정으로 내 무릎 위에 잔뜩 쌓여있던 초콜릿 박스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시리우스는 옆에서 아주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래, 시리우스. 네가 기분이 나쁘다는 건 알겠지만, 나로서는 참기 어려웠단 말이야.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내려다보기만 하며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시리우스의 흉흉한 기운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잘못했다고 말해야하는데.
*
발렌타인 데이는 어느 과자 회사의 상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인들이나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참 훌륭한 날이다. 달콤한 초콜릿을 내밀며 살살 꼬실 수 있으니까. 잘 되면 만사 좋은거고, 잘 되지 않더라도 눈물에 젖은 초콜릿 역시 여전히 달기는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무뚝뚝하기 짝이 없고, 초콜릿보다는 술을 더 좋아하며-진짜다. 위스키 봉봉도 초콜릿을 쪼개 술만 마시고 버릴 사람이다- 단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는 남자를 당신이 애인으로 가지고 있다면 발렌타인 데이는 그냥 평일이나 다름 없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런 남자가 시리우스였고, 현재 나는 시리우스와 교제를 하고 있다. 내가 남자라는 것은 그냥 넘어가자.
나는 초콜릿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 애인이 초콜릿을 싫어한다면 나는 발렌타인 데이 때는 뭘 선물해야할까? 어제는 정말로 밤새도록 고민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초콜릿, 달지 않은 초콜릿, 초콜릿 과자 같이 먹기 쉬운 초콜릿 간식들을 생각하다가 오히려 내가 먹고 싶어져서 밤에 마켓에 갔다 왔다. 잔뜩 샀지만 순식간에 빈 봉지와 포장지만 남은 것을 내려다보며 이번 발렌타인 데이는 큰 마음 먹고 넘어가자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역시 힘이 빠지는건 어쩔 수 없지. 등교길에 유난히도 많이 보이는 커플들을 보며 나는 아침 공기에 섞인 단내를 들이마셨다. 그래도 한 번쯤은 시리우스가 주는 초콜릿, 먹어보고 싶었는데. 시리우스가 늘 아침마다 보내던 같이 가자는 문자도 없어서 더 서러웠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혼자서 등교를 하고, 교실로 향해 내 책상 위에 앉았는데....
내 책상이 아닌가?
책상 위에 쌓인 대 여섯개의 포장된 상자를 멍하니 보다가 나는 일어나 다시 자리를 살폈다. 옆 책상은 시리우스가 일주일 전 수업시간 내내 판 S.B가 흉하게 새겨져있었고, 그 앞의 책상에는 제임스의 가방이 의자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었다. 그럼 여기는 내 자리가 맞는데. 나는 상자를 잠깐 노려보다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래, 작년 이맘때도 초콜릿을 몇 개 받긴 했지만, 그 후로 시리우스와 사귀어버려서 초콜릿을 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는 제임스와 프랭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나와 시리우스의 관계를 몰랐던 것이다. 결국 이 초콜릿은 나에게 주어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란 말인가.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가장 위에 놓인 상자를 뜯으려다가 내려놓았다. 어쨌든 나에게 주어진거라고 해도 남이 준 초콜릿을 먹는 꼴을 보이면 시리우스가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을테니까. 아침 종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나는 서랍 속에 허겁지겁 상자들을 쑤셔넣었다. 하지만 시리우스와 제임스는 사이 좋게 첫 교시 내내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수업시간 내내 단내의 유혹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점심시간까지 나는 안절부절 하고 있었다. 시리우스와 제임스 때문이 아니라, 내 책상 서랍 안에 있는 초콜릿들 때문에. 무심코 교과서 때문에 서랍 안에 손을 넣다가 상자가 손 끝에 닿아 화들짝 손을 빼버리기도 했다. 초콜릿, 시리우스. 초콜릿, 시리우스, 초콜릿. 나는 머릿속으로 계속 재고 있었다. 하나만 맛 보는건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준 성의가 있는데, 준 사람이 내가 이걸 그냥 버린다면 정말 슬퍼할거야. 하나라도 먹는게 성의에 대한 보답이 되지 않을까.
구구절절 이유를 삼백가지 정도 생각해내고 마지막으로 지구 온난화와 자원낭비까지 들먹이며-물론 혼자서만-점심시간 종이 울리자 마자 상자를 손에 잡히는대로 낚아채 옥상으로 달려갔다.
문을 닫고 난간에 기대 무작정 포장지를 북 뜯었다. 잘 먹을게, 에밀리. 포장지 안에 들어있던 작은 카드를 건성으로 읽어보고 카드는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상자를 열자 황홀하도록 달콤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졌다. 순간 표정이 느슨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열심히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은 생크림이 든 쌉싸름한 다크 초콜릿이 제격이지. 아니면 달콤한 밀크 초콜릿과 아몬드로 혀를 미리 준비시켜두는게 나을까. 화이트 초콜릿과 딸기퓌레의 조합도 멋질거야. 겨우 겨우 하나를 골라 입 안에 밀어넣자 약간의 캐러맬 향이 나며 초콜릿의 코팅과 함께 부드럽게 녹는데, 정말로 근사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늘을 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초콜릿 한 상자를 다 해치우고 다음 상자를 고르고 있었는데.
순간 굉음이 나며 옥상 문이 거의 떨어져나가다시피 했다. 깜짝 놀라 막 뜯으려던 두 번째 상자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누가 신성한 초콜릿 시식 시간에 옥상에 쳐들어왔는지 그 고운 얼굴 좀 보자라는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니 맙소사. 시리우스가 이 쪽을 죽일 듯한 눈길로 보고 있더라. 하마터면 심장마비가 올뻔 했다. 그 뒤로는 손에 든 걸 집어던지려는 시리우스를 제임스는 억지로 말리며-"우리 사랑스런 무니에게 폭력이라니! 못되먹은 멍멍이구나!" "널 집어던지기 전에 닥쳐라, 제임스 포터."- 간신히 상황을 수습 시켜줬지만, 기왕 수습 시켜줄 거 시리우스를 기절시켜주지 그랬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시리우스의 눈길에 질식사 당하기 5초 전, 4초 전, 3초 전, 2초 전, 1...
"죽을래?"
아까부터 죽을래 같은 말만 주구장창 해댔으니 레파토리를 좀 바꿔보는건 어때.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너에게 죽으면 내가 꼴이 뭐가 되니. 게다가 너는 지금 특별히 날 오체분시 시켜도 전혀 성에 찰 것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이야. 손가락만 내려다보며 제임스가 하나하나 수거해가는 초콜릿 상자에 안타까운 눈길을 주고 있자니 위에서 뭔가가 머리를 콱 짓눌렀다. 목뼈가 나갈 뻔 했어!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아무래도 어차피 죽을 거, 건강한 목뼈를 지키고 죽자는 결심으로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무언가가 내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자그맣게 리본이 달린 검은색 상자. 눈대중으로는 딱 파베 초콜릿 4개 분량의 상자다. 이걸 왜?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시리우스의 얼굴은 생각 외로 많이 누그러져 있었고, 생각보다 많이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그거, 멍멍이가 직접 만든거다."
제임스는 내 초콜릿을 몽땅 가져가다니 기어코 하나씩 까먹으며 툭 던지듯 말했다. 제임스, 내가 아무리 이렇게 보여도 미치진 않았단다.
"제임스. 시리우스가 초콜릿을 만들다니, 네 성적이 전교권 순위 안에 드는 소리 하지마."
"먹고 죽을래?"
으음. 하지만 시리우스는 단걸 정말 싫어하는데. 제임스가 전에 해 준 이야기로는 발렌타인 때 받은 초콜릿을 시리우스는 몽땅 쓰레기통에 처박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만큼 단 거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는 시리우스가 초콜릿을 만들다니, 어림 없는 소리.
"......이거 안에 혹시 폭발물이니?"
"오, 시리우스, 무니가 안 믿잖아. 내일 죽을 거 같은 짓은 그만 두랬지!"
"넌 지금 죽을래?"
아웅다웅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의심 반 공포 반으로 상자를 두어번 흔들어보다가 조심스럽게 열었다. 매끄러운 포장지로 싼 초콜릿들과는 달리, 정말로 상자만 있는 스트레이트한 초콜릿이라. 안에는 의외로 평범한 초콜릿이 딱 네 조각 들어있었다. 하나, 둘, 셋, 넷.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네 조각. 이건 사실 초콜릿을 위장한 판자조각이 아닐까. 아니면 할라피뇨를 넣었을지도 몰라. 그래서 먹으면 내가 난간을 타고 뛰어내릴지도 모르지...
내 뇌는 온갖 가능성을 다 제시하고 있었지만 내 손가락은 이미 그 중 한 조각을 집어들고 있었다. 발렌타인 데이에는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내민다는 관습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시리우스가 그렇게 애교스러운 짓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은 시리우스 성격에 선물 같은걸 준비할 리가 없다고 은연 중에 생각해버린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시리우스는 내 예상을 벗어나는 짓을 한다. 그게 언제나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은 유쾌하니까 괜찮지 않을까. 입을 우물거리며 초콜릿 조각을 응시했다. 겉면에는 코코아색 가루가 잔뜩 묻혀져있고, 부드럽고 단단한 촉감에다가, 확실하게 달콤쌉싸름한 단내도 난다. 나는 문득 제임스와 시리우스가 입을 다물고 이 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느릿느릿, 시리우스가 충분히 감질나도록, 천천히 입 속에 초콜릿을 밀어넣었다.
"네가 이 녀석이 어젯밤부터 초콜릿 만든다고 하는 걸 봤어야했어, 초콜릿 녹이다가 못 하겠다고 부엌에서 뛰쳐나오던걸 내가 억지로 밀어넣었다니까?"
"초콜릿만 먹다보니 좌뇌우뇌를 카카오 농장으로 보냈나. 초콜릿은 이렇게 녹이는거라고 하다가 물에 통째로 빠뜨린 놈이 누군데?"
"그게, 광견병 걸린 것마냥 점심시간 내내 무니의 이름을 짖어대던 개..."
"미치려면 잘 미쳐라. 하필 갑절로 미쳐서 멀쩡한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잠깐 텁텁한 입 안에서 혀를 굴리며 시리우스의 바지를 잡아당겼다. 시리우스는 고개를 내렸고, 나는 반대로 고개를 들었다. 눈길이 엇갈리며 시리우스는 다시 숙였던 머리를 들었다. 누가 보면 눈 맞추기도 싫어서 그런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은 부끄러운거지?
"시리우스. 이거 맛있다, 내년에 또 해줘."
"다른 놈들 초콜릿 주워먹는거 한 번만 더 눈에 띄어봐."
"해줄거지?"
"차례대로 앞에 세워서 다리를 분질러주겠어."
"그래도 난 말린 과일 넣는게 좋아."
"......너희 지금 제대로 대화하고 있는거냐? 어?"
제임스는 짜증을 내며 빈 상자를 집어던졌고, 멋지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상자를 시리우스가 잡아채는 것을 보며 나는 초콜릿을 한 조각 더 집어들었다. 초콜릿 수백상자와 맞바꾸어도 달 수 밖에 없는 그런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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